2021년 2월 14일 주일저녁예배 "크신 하나님"

에스더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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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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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더 3장 1-15절
-제목 : 크신 하나님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으로 다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주제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의인에게는 예상치 못한 여러 환난과 고난이 따르는데, 반면 악인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도 형통함을 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에스더 3장 말씀도 그러한 면에서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모르드개와 하만의 대립을 통해서 이 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에스더 3장의 배경이 되는 1절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먼저 “그 후에”라고 하는데 이것은 에스더가 왕후에 오르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입니다. 지난 에스더 2장을 보면 사건 두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스더가 왕후에 오른 것이고, 또 하나는 모르드개가 암살음모를 밝혀서 아하수에로 왕을 구한 사건입니다.
에스더 2장 16절을 보면 “아하수에로 왕의 제칠년 시월 데벳월에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앞에 나가니”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한 지 제 7년에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에스더 3장 7절을 보면 “아하수에로 제십이년 첫째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제비를 뽑아 열두째 아달월을 얻은지라
에스더 3장은 아하수에로 왕 제 12년이라고 말합니다. 즉, 2장과 3장 사이에 약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되어 존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가 세운 공은 인정받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린겁니다.
근데 문제는 다시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대신 위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만의 지위를 페르시아 제국의 2인자로 세웠다는 겁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하만이 무슨 자격과 공로로 페르시아의 2인자 세워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만에게 집중하는 것은 그의 배경입니다.
1절에 보면 하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데, 하만은 아각 사람이며 함므다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아말렉 사람의 왕을 아각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애굽왕 바로처럼 왕으로서 보통이름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애굽 왕 바로가 여럿 등장합니다. 요셉을 총리로 세운 바로 왕이 있고 모세와 대적했던 바로 왕이 있습니다.
그처럼 아각이란 이름도 아말렉 왕을 보통 아각이라 부릅니다. 즉 하만을 아각사람이라 한 것은 그도 아말렉 왕족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말렉과 이스라엘은 언제나 대적관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부터 방해하고 대적했던 민족이 아말렉입니다.
여기서 모르드개의 뿌리를 다시 살펴보면 에스더 2장 5절입니다. “도성 수산에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모르드개는 베냐민 자손이며 기스의 증손입니다. 즉 사울 왕과 같은 뿌리입니다. 또한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아말렉 족속은 사울 왕에게 전쟁에서 패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모르드개와 하만은 대적 관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밝혀 공을 세운 모르드개는 여전히 낮은 자리에서 성전 문지기로 있습니다. 반면에 하만이란 사람은 이유는 자세히 모르지만 페르시아의 2인자로 높이 세워졌다는 겁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2인지라로 하만은 왕과 왕후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절을 받을 만큼 존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갈등이 하나 생깁니다. 본문 2절부터 4절입니다.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가지 이 발생합니다. 첫째는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또한 반복적으로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주변의 신하들이 이것을 하만에게 알린 사건입니다.
먼저 모르드개가 왜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았는가를 살펴봅시다. 사실 성경을 잘 살펴봐도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본문 4절을 봅시다.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날마다 권하였다고 합니다. 즉 한 두 번이 아니라 매번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으니깐 주변의 신하들이 그에게 지속적으로 충고했을 겁니다. 그러다 큰 일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가지만 밝힙니다.
본문 4절 중간에 보면 나는 유다인이다. 갑자기 자기의 뿌리를 드러냅니다. 사촌 동생 에스더에게는 죽어도 자신의 민족과 종족을 밝히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자신은 의도적으로 드러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는 성경에서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믿음의 자각이자 동시에 고백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신비입니다. 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뿌리를 감추어야 했던 모르드개가 스스로 자신이 유다인이란 사실을 밝히는 면.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마치 모세가 애굽의 왕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어느날 자신의 형제 히브리인을 애굽사람이 치는 것을 보고 애굽인을 죽였던 모세처럼, 모르드개도 어느 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온전히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것인지 분명한 방향을 잡은 같습니다. 신명기 25장 17절에서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에게 원수이자 대적입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완전히 진멸해야 할 적이란 것을 보여줍니다. 신명기 25장 19절에 보면 후반절에 보면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여기서 ‘아말렉에게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이 부분이옛날 개역한글 버전에서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이 원문에 더 가까운 좋은 번역입니다. ‘도말하다’라는 뜻이 깨끗하게 닦아 내다. 혹은 전멸시키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아말렉 족속은 깨끗하게 전멸시켜야 하는 대적입니다. 따라서 모르드개에게 하만은 대적일뿐 존귀와 높임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즉, 모르드개는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큰 위험이 발생합니다.
다시 본문 4절입니다.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사실 하만에게 모르드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런 신경도 안썼을 것이고 심지어 모르드개가 절을 하는지 조롱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하들 중에는 하만의 편에 선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에 눈에 모르드개가 들어온 것이고 그들은 곧장 하만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결과가 5절과 6절입니다. 먼저 5절입니다.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더니” 여기서 주목해 볼 단어가 5절 말미에 “노하더니”입니다.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헤이-마”인데 에스더 전체에서 딱 2번만 쓰인 단어입니다. 첫째는 에스더 1장 12절입니다.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붙는 듯하더라
‘왕이 진노했다’라고 할 때 동일한 단어가 쓰이는데, 이러한 진노 뒤에는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진노하자 하루 아침에 왕후 와스디는 폐위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2인자인 하만이 매우 분노했을 때는 본문 6절입니다.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나라에 있는 유다인 모르드개의 민족을 멸하고자 하더라
하만의 진노로 인한 후폭풍은 아하수에로의 나라에 있는 모든 유다족속의 멸절입니다. 왜냐면 모르드개가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절하지 않는 것도 매우 분한 일이지만 그가 바로 유다족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만의 조상인 아각왕은 사울 왕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사무엘 손에 죽게 됩니다.
즉, 유대족속을 향한 증오심과 분노를 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르드개의 행동을 계속 방치하면 자신의 권위도 흠집이 생기는 때문입니다.
이제 하만은 유대민족을 멸절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페르시아의 2인자로 올라올 사람이면 하만 그도 보통사람은 아닙니다. 엄청난 권모술수를 가진 사람이며, 심지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때는 민족 전체를 말살할 정도로 잔혹한 사람입니다.
이제 7절부터 15절까지 보면 하만이 유대민족을 멸절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면을 보게됩니다. 즉, 믿음으로 살기위한 모르드개는 고난과 역경에 빠질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하려는 하만은 형통케 되는 일을 보게됩니다.
7절부터 보면 하만은 고대 근동에 종종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부르”라고 불리는 제비뽑기로 유다인들을 죽일 날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왕의 결제를 받기 위해서 왕과 면담 중에 교활한 말로서 아하수에로 왕을 공략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하만은 적절하게 거짓말을 섞어서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합니다. 8절을 자세히 보면 맞는 말도 있도 틀린 말도 있습니다. 첫째는 민족이 왕의 나라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사는 족속이 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당시에유대 포로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둘째는 법률이 다르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말입니다. 셋째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한다. 이것은 완전한 거짓입니다. , 하만은 교묘하게 민족이 누군지는 정확하게 밝히진 않고 법을 지키지 않은 무리가 있다 라고 호도 후에 이것은 왕을 위한 일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 보면 하만은 마지막 일격을 날립니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해서 은 1만 달란트를 기부하겠다고 합니다. 엄청난 액수 입니다. 다리오 때에 페르시아가 1년 동안 거둬들인 세금기록이 있는데 액수가 은 1만 4,560달란트 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만이 제시한 은 1만 달란트는 페르시아의 1년치 세금의 약 60% 입니다.
대단한 금액입니다. 아마도 아하수에로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아주 솔깃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에스더 2장에서 살펴보았지만 아하수에로왕은 지난 페르시아 2차 전쟁에서 패전하고 많은 손해를 봤기 때문입니다. 병사만 약 30만명을 잃었고 거기에 많은 군수물자를 잃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봤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만이 제시하는 이 금액은 참으로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본문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이르되 은을 네게 주고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하만이 제시한 조건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곧장 자신의 반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를 하만에게 맡깁니다. 이로서 하만의 뜻대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 보면 이제 하만을 막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유다인을 진멸할 조서가 쓰여지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받은 반지로 인을 칩니다. 왕궁의 병사들을 이 조서를 가지고 페르시아 모든 지역에 전달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했던 모르드개의 일로 이제 페르시아에 사는 유다인 전체가 위기에 처합니다. 말 그대로 모든 유다인들에게 사형선고가 떨어졌고 이제 그들의 삶은 시한부 인생으로 바꼈습니다. 수산 성 전체가 이 일로 인하여 어지럽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과 대조적으로 아하수에로 왕과 하만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비열하고 잔혹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들은 함께 앉아 마시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 자신들을 대적할 자가 누가 있을까 생각하며 오만하고 교만한 모습으로 이 광경들을 지켜 봤을 겁니다.
참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의인에게는 예상치 못한 여러 환난과 고난이 따르는데, 반면 악인은 오히려 더 형통해집니다. 하만의 권위는 더 높아졌고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에스더 3장까지만 보면 의인은 망했고 악인은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은 찾아볼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경은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서 아주 심플한 답변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의인이 왜 고난을 받는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악인이 왜 형통하는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좀 더 쉽게 풀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을 때도 하나님을 일하십니다. 악인이 형통할 때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에스더 3장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에스더 3장을 얼핏보면 하만의 형통함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만의 교만함에도 헛점이 있습니다.
다시 본문 7절을 잘 살펴봅시다. “아하수에로 제십이년 첫째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제비를 뽑아 열두째 아달월을 얻은지라
하만이 교만하여 유다인들을 멸할 날을 제비뽑습니다. 먼저 제비를 뽑았던 시기는 7절에 보니깐 첫째 달 곧 니산월이라고 하는데 우리로 치면 1월 초입니다. 근데 하만이 유다인들을 멸할 날이 언제로 뽑혔냐면 열두 째 달 곧 아달월이라고 합니다.
우리로 치면 12월입니다. 그래서 가만보면 제비를 뽑고 보니깐 11개월 뒤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만의 마음이 계속 교만하여져서 일이 이렇게 늦춰져도 괞찮은겁니다. 누구도 자신을 반대할 수도 없고 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납니다. 잠언 16장 33절을 보겠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여러분 하만의 교만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모든 일이 다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진 줄 아는 착각입니다. 그런데 잠언 말씀을 보면 제비를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쉽게 말해서 미리 보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하만이 이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하만의 교만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하십니다. 나중에 보면 많은 유다인들이 왕의 조서로 시한부 인생이 된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에게 11개월이란 시기는 영적 대부흥기입니다.
왜냐면 에스더 말씀이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에스라 6장과 7장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포로귀환을 기준으로 보면 1차 귀환이 끝나고 아직 2차 3차 귀환을 하기 전이 에스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건지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시편 121편 4절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따라서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은 하나님의 섭리로 쉽게 풀어집니다. 결국에는 하나님 편에 선 자가 최후승리를 얻습니다. 이것을 붙드시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삶의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 악인의 형통함보다 더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중앙가족 성도들이 이러한 면에서 크신 하나님으로 위로 받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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